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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와 금괴 5,500상자 200톤을 싣고 울릉도에 침몰한 150조원 보물선 돈스코이호 탐사, 인양을 보도할 국내외 신문사, 방송사, 시민참여단을 모집합니다.


돈스코이호는 실존하는 보물선임에도 그동안 제대로 된 탐사 영상과 잔해 등 눈에 보이는 증거물들이 부족하여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번 탐사 및 잔해 인양을 통해 돈스코이호와 보물의 존재를 세계에 공개하겠습니다.


신일그룹은 돈스코이호 인양사업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추진되는 만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시민참여단을 참여시켜 국민들과 함께 인양되는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일그룹에서는 돈스코이호를 인양함에 있어 국가유공자, 생활보호대상자, 취업준비생, 상이군인 등 1차 1,000명 등을 대상으로 인양 참관을 비롯한 전 과정에 참여시켜 투명하게 모든 과정을 공개할 예정이며 현재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 중에 있으며 추후에는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돈스코이호 인양 후 실질적인 지원도 하고 직접 일자리도 창출하겠습니다.


[신일그룹 150조원 울릉도 보물선 돈스코이호 인양사업]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보물선


5,500상자 200톤의 금화를 가득 싣고 있는 보물선이 우리나라 울릉도 앞바다에 잠들어 있는 것을 아시나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보물선이 있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감동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신일그룹과 함께 150조원 울릉도 보물선 돈스코이호 인양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1. 돈스코이호 개요 


1904년 2월 8일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함대가 중국 뤼순군항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러시아소속 제2태평양함대의 제2전대에 소속된 순양함이 드미트리 돈스코이호(Dmitri Donskoi Ship)입니다. 


러시아 해군함정은 전통적으로 역사적 영웅의 이름을 따 명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돈스코이호는 1380년 타타르족을 물리친 러시아 건국 영웅 드미트리 돈스코이 (1350~1389) 대공의 이름을 따 명해졌으며 1905년 5월 29일 일본 함대의 포위를 뚫고 블라디브스토크(Vladivostok)로 향하다 울릉도 앞바다 70㎞ 해상에서 일본군에게 다시 포위됐습니다. 당시 돈스코이호 함장 레베데프 대령과 선임장교 블로킨 중령은 배와 최신 군함의 설계도, 군자금을 일본 해군에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울릉도 동쪽 앞바다로 최대한 배를 이동시킨 뒤 774명의 승조원들에게 해변으로 가라고 명령한 뒤 킹스턴 밸브를 열고 스스로 자침하였습니다. 


이같이 돈스코이호는 대마해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발트함대의 마지막 순양함으로 러시아 해군 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함정으로 칭송됐으며, 러시아 정부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따라 일본에게 패전 보상금도 지불하지 않았으며, 패전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스스로 자침한 돈스코이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러시아 정부와 국민들에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전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되는것이 바로 돈스코이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거북선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며, 세계 최대 크기의 핵잠수함을 '드미트리 돈스코이호(TK-208)'로 명명할 정도로 러시아는 현재도 돈스코이호의 정신을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해군중앙역사박물관에 돈스코이호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러·일전쟁에서 장렬히 최후를 맞았던 역사적 기록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최대 핵잠수함 돈스코이호는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있습니다.


침몰된 돈스코이호의 탐사작업은 1981년에 이루어졌으나 장비와 경험부족으로 실패한 후 2002년 10월 동아건설이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연구원에 용역을 주고 탐사에 착수, 울릉도 인근에서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선체의 일부를 발견하였으나 그 후 동아건설의 파산으로 작업은 중단되었고, 신일그룹에서 현재 새롭게 인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2. 돈스코이호 발굴경위 및 진행상황


돈스코이호는 해양수산부도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실존하는 보물선입니다. 현재도 해양수산부는 공식 blog [ http://blog.naver.com/koreamof/120199092591 ] 와 공식 youtube 동영상 서비스 [ https://youtu.be/RbInoH2_tIY ] 를 통해 역사적 사실과 해저탐사를 통한 존재 확인을 적극 홍보하고 있습니다. 


보물선 돈스코이호가 최초 발견되고 17년이 지난 2017년 새로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국민들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일그룹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돈스코이호 탐사 및 인양을 시작하였습니다. 

3. 돈스코이호 발굴목적 


발굴되는 매장물의 50%를 문재인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기부하고, 러시아 돈스코이호 추모비, 박물관 건립, 방송,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웹툰, 뮤지컬, 소설, 울릉도 관광상품 개발 등을 통해 국가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고 울릉도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겠습니다.


4. 돈스코이호 인양 작업계획 

 

돈스코이호 인양은 (1)선체탐지작업, (2)선체식별작업, (3)선체내 매장물 샘플링작업, (4)선체인양의 4단계로 진행할 예정이며 사업지역의 기상여건등을 고려하여 순차적으로 2017년 12월부터 152mm 함포, 속사포지지대, 조타기 등 잔해부터 인양하여 울릉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시할 예정이며, 준비가 모두 끝난 만큼 최대한 서둘러서 2018년 상반기내로 선체 인양까지 마무리하고 돈스코이호를 세상에 공개하겠습니다.


5. 돈스코이호 배 가치 및 보물 매장량 


돈스코이호는 러시아의 거북선으로 불리는 군함으로 역사적 가치로만 10조원으로 추산되며, 돈스코이호에는 금화·금괴 5,500상자(현시세 150조원)의 보물이 실려 있습니다. 


6.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돈스코이호의 존재 역사적 사실과 기록들 

 

① 러시아 해전사 기록


현재 러시아 해전사 기록보관소에는 돈스코이호 선임장교 블로킨 중령의 보고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일본 함정의 공격으로 러시아 해군이 사망자가 속출하고 상갑판이 크게 파손된 돈스코이호 전함이 울릉도 동쪽 해안 수심 200 ~ 400m 깊이에 침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일본 해군사령부 극비문서 


현재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해군사령부 극비문서인 러·일전쟁 당시 돈스코이호를 추적했던 일본의 도오고오 해군대장 지휘의 연합함대 일본제1함대 전투정보 교신내용을 보면 가스가호 사령함이 "확실히 돈스코이호라고 확인했는가"라는 교신에 후부끼호 전함은 "확실히 돈스코이호이다"라고 답신함으로써 1905년 5월 29일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배는 돈스코이호가 확실함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③ 일본 러·일전쟁 전사자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에 러·일전쟁 전사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 "돈스코이호가 동망루 정동쪽 1,5해리 떨어진 곳에 침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④ 일러전사(日露戦史) 제4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에 보관되어 있는 일러전사 제4권을 보면 "울릉도 부근을 탐색했던 우류 소토미치(瓜生外吉;1857년 1월 27일~1937년 11월 11일. 대일본제국의 해군군인. 최종계급은 해군대장. 이시가와현(石川県) 출신) 중장이 지휘하는 「치토세(千歳)」등은 적함인「드리트리 돈스코이함」을 발견, 추격하여 울릉도 남쪽 약30해리에서 포격전이 있었지만 격침하지 못하고 밤이 깊어져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29일 아침, 부상이 깊은 모습으로 울릉도 동남쪽 연안에 표착해 침몰하기 직전인 이 배를 발견했다. 전날 놓쳤던 「돈스코이함」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⑤ 일러전쟁실기(日露戦争実記) 제75편


일러전사(日露戦史)와 함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에 보관 되어있는 일러전쟁실기 제75편을 보면 「돈스코이함의 격침」이라는 페이지를 마련해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 울릉도 항구 내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이 배를 발견하고 신호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울릉도 상륙을 시작했다. 그 동안 배는 점차 기울어 오전 8시경에 침몰했다. 일본 측은 보트로 선장을 소환하려 했지만 선장은 중상을 입어 보행이 불가능하다고 부선장이 일본선으로 알려왔다. 상황을 질문하자 어제와 어제 밤의 전투로 일본 측 수뢰 6발을 맞아 배 안으로 물이 심하게 들어와 전원이 철야로 배수를 했지만 효과가 없어 배는 침몰했다고 한다. 부선장은 자신들이 무리해서 쓰시마수도(対馬水道)를 통과하려고 한 건 무모하고 어리석은 방법이었다고 눈물을 흐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⑥ 1905년 8월 1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 보도와 울릉공보(鬱島公報) 


돈스코이호의 울릉도 자침에 대하여 1905년 8월 10일 (대한광무9년 8월 10일자) 서울에서 간행됐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울릉도의 군수인 심흥택으로부터의 보고를 기초로 한 「울릉공보(鬱島公報)」로 보도하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당시 울릉도 군수 심흥택 씨의 보고에 따르면 "군의 향장(郷長)인 전재항(田在恒)으로부터의 보고로 음력 4월 25일에 울릉도 앞의 서남쪽 먼 대양에서 큰 뇌우 소리가 들려왔다. 일몰 후에는 뇌화(雷火)가 점차 도동(道洞)의 앞 바다로 다가와 대포가 연이어 발사되는 것 같았다. 잠시 조용해진 후에 심야에 한 척의 대전함(大兵艦)이 섬 앞으로 와서 정박하고, 승조원이 순서대로 상륙해왔다. 밤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지 러시아인지 몰랐지만, 다가가 보자 러시아병사였다는 급보가 도착하여 현지로 가서 사정을 확인하려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을 즈음에 러시아병사 여러 명이 상륙한 후에 그 러시아함정은 앞바다를 조금 물러나 스스로 가라앉았으며(自沈), 육지로 올라온 선장 1명, 부선장 1명, 군졸 774명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의 뜻을 내보였지만 이날 사시(巳時;열두 시의 여섯째 시(時). 곧 오전(午前)9시부터 11시까지의 동안을 가리킴.)경에 일본의 전함(兵艦) 1척이 저동(苧洞)으로 와 항복한 러시아병사들을 태워 떠났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병함(兵艦)에 대해 '일러전사(日露戦史)'는 "이 함정의 생존자는 「카스가(春日)」, 「후부키(吹雪)」 등에 구조되어 수용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⑦ 2011년 10월 21일자 일본 다케시마문제연구소 연구협력원 보고서


울릉공보에 나오는 심흥택(沈興澤), 전재항(田在恒)에 대해서는 돈스코이호 자침 다음 해인 1906년 3월 28일에 시마네현 제3부장 진자이 요시다로(神西由太郎)를 단장으로 한 다케시마조사단(竹島調査団)이 다케시마(독도) 조사 후 울릉도에 들렀을 때 면회하고 돈스코이호함 자침에 대하여 확인한 사실이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의 '다케시마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에 쓰여 있습니다.


심흥택에 대해서는 "군수 심흥택을 면회하다. 군수는 경성 사람으로 연령은 52세, 너그러운 인상으로 방석위에 꿇어앉아 흰 옷을 입고 관을 썼으며 긴 담뱃대를 지니고 옆의 책상에 여러 권의 부책(簿冊;돈이나 물건(物件)의 드나드는 셈을 적어 두는 책.)이 있을 뿐, 간단하고 소박한 태고 느낌이었다(郡守沈興澤に面会す。郡守は京城の人、年歯五十二、寛裕の相を備へ座布団の上に跪座し、白衣を着し、冠をつけ、長煙管を携へ、傍なる机上に数部の簿冊あるのみ、簡単素朴頗る太古の風あり)"고 되어 있으며, 전재항에 대해서는 밭전(田) 자를 유(由)자로 잘못하여 유재항(由在恒)으로 하고 있으며, 사상의소(士商議所)의 소장 고문이라는 직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흥택에 대해 오쿠하라 헤키운은 "행정상의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요령을 얻지 못했다(行政上の質問に対しては、多くは要領を得ざりき。)」라며, 일본인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번 『다케시마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다케시마(독도) 시찰원의 시가(詩歌)를 편집한 것이라는 「한조여운(寒潮余韻)」에서는 심흥택이 「진자이 사무관에게(呈神西事務官)」라며 단장인 진자이 요시다로(神西由太郎)에게 보낸 한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海道茫々両々晴 汽船南到報昇平 従此両国情還密 一色桃花満春城」"라며 당시 일본에서 울릉도 군수 심흥택과 군의향장 전재항을 면회하고 돈스코이호 자침에 대하여  확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⑧ 1887년 출판된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씨의 "무명용사의 수기"


1905년 5월 29일 오전 6시 46분 심각한 부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돈스코이호 함장 레베데프 해군대령을 대신하여 함선을 지휘한 선임장교 블로킨 해군중령의 명령에 따라 모든 승조원들이 섬에 상륙한 후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킹스턴 밸브를 열고 스스로 자침하였습니다.   


수기를 보면 홍순칠씨의 할아버지인 홍재현 옹이 목격한 돈스코이호의 자침 당시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들, 그리고 엄숙한 그의 표정, 북쪽을 향해 차렷 자세로 서더니만 경례를 하고는 함교에 자기 몸을 묶고 배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내눈으로 똑똑히 봤어. 순칠아 그 얼마나 멋진 죽임이냐! 하물며 패전의 장군이 그렇게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할아버지는 잊을 수 없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홍재현 옹이 울릉도 주민들과 함께 바다속으로 가라앉던 돈스코이호의 함장 레베데프 대령과 선임장교 블로킨 중령, 승조원 774명을 구조하게 됩니다.


독도의용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씨는 할아버지인 홍재현 옹이 자신과 러시아 승조원들을 구조해준 고마움의 선물로 돈스코이호 레베데프 함장으로부터 받은 동주전자에 가득 담겨있던 금화와 보석을 팔아 1954년 4월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으며 무기 등 장비를 구입하고 주민들과 함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수차례의 총격전을 감행하였습니다.


⑨ 2003년 5월자 대한토목학회지 논문 "돈스코이호 자침 이후 승조원들의 행적"


대한토목학회지 제51권 제5호, 2003. 5, P 52-54 (3 pages) 논문 "돈스코이호 자침 이후 승조원들의 행적" 을 보면 「1905년 5월 29일 오전 6시 46분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 가라앉은 돈스코이호는 전날 밤 어둠속에서 요행히 저동으로 숨어들어 적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미 탄약은 거의 소진되었고 보일러도 관통되어 탈출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중상을 입고 누운 함장을 대신하여 부장이 주재한 심야 장교회의에서 사용가능한 단정으로 승조원들을 하선시킨 후, 함장은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침시키기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돈스코이호에서는 밤새껏 하선 작업이 계속되었고, 날이 밝아오자 부장은 아직도 갑판 위에 남아있던 승조원들에게 각자 알아서 육지로 헤엄쳐가라고 퇴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일단의 청년 장교들과 함께 배를 앞바다로 몰고 나가 킹스톤 밸브를 열어 자침시킨 후 단정을 타고 다시 육지로 되돌아갔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⑩ 2005년 12월자 대한토목학회지 논문 "돈스코이호 함장의 최후"


대한토목학회지 제53권 제12호, 2005. 12, P 148-153 (6 pages) 논문 "돈스코이호 함장의 최후 (The Last of the Captain of Dmitry Donskoi)" 를 보면 「돈스코이호 레베데프 함장은 1905년 5월 29일 울릉도 앞바다에서 돈스코이호를 스스로 자침시킨 후 당시 일본군 장교 나이또 중위 일행에게 체포되었으며 나이또 중위 일행은 "이전 전투에서 보여준 귀함의 용감한 모습과 위대한 함장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며 경례를 했다. 레베데프 함장과 러시아 774명의 장병들은 일본 마츠야마에 세워진 임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당했으나 레베데프 함장은 이미 전투시 심한 대퇴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다음날 사망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당한 돈스코이호 장병들은 일본측에 요구하여 레베데프 함장의 장례식을 거행했고 함장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키 러시아인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종전 후 러시아로 송환 조치되었습니다.


⑪ 2013년 KRD (KOREA - RUSSIA DIALOGUE) 한러대화 "러일전쟁과 돈스코이호’의 학술적 조명"


2013년 5월 10일 한러대화 교육과학분과는 고려대학교 러시아센터에서 2010년 제1차 KRD포럼에서 제기된 바 있는 러시아 군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와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 양국 근현대사 문헌과 해양 전문가의 연구자료 등을 토대로 논의하는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회의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으로 1905년 러·일전쟁 중 쓰시마해전에서 일본의 항복요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울릉도 앞바다에 자침한 러시아의 순양함이라는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에 참석자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당시 참석자로는 정태익 (우석한국영토연구소장, 전 주 러시아 대사, 전 이명박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박성욱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정책·영토연구실장, 책임연구원, '돈스코이호의 국제법적 검토' 발표), 심헌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러일전쟁기 동해해전의 전개와 돈스코이호' 발표), 최덕수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과대학 학장), 가민호 (교육과학분과위원, 연세대학교 글로벌융합공학부 교수), 김도현 (기획재정부 대외경제국 남북경제과 과장), 최용규 (외교부 국제법규과 서기관), 이원휘 (울릉도 ‘독도박물관’ 학예연구사). 드미트리 쿨킨 (주한 러시아대사관 1등 서기관), 그 외 한러대화 관계자 등 20인으로 국내 민·관 한러 전문가들이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⑫ 2015년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논문 "러시아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와 고종"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의 '러시아연구' 25권 1호 P 141-164 (23 pages)를 보면 국사편찬위원회(2007a),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 2권 (1894 ~1899), 해외사료총서 12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토대로 「1888년 첫 극동항에에 나선 돈스코이호 레베데프 함장은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협력관계를 맺었고, 을미사변 이후 정국타개책으로 단행한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시에는 한양에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공사관 수비임무를 담당하여 고종황제를 호위하였으며 1905년 5월 29일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 자침을 결정하여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⑬ 해양수산부 공식 인정 


현재 해양수산부는 공식 blog 

[ http://blog.naver.com/koreamof/120199092591 ] 와 

공식 youtube 동영상 서비스 [ https://youtu.be/RbInoH2_tIY ] 를 통해 역사적 사실과 해저탐사를 통한 존재 확인을 적극 홍보하고 있습니다. 


⑭ 설계도 모형과 침몰선 구조 모두 일치 

 

돈스코이호의 설계도에 따라 제작된 모형과 2002년 10월 발견 당시 수중탐사 영상을 통해 확인한 침몰선을 돈스코이호와 비교해보면 152mm 함포, 조타실, 속사포 지지대 등이 모두 일치하며 침몰선은 돈스코이호가 맞습니다. 152mm 함포는 군함에만 설치가 되는 것이고 당시 기록에 의하면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군함은 돈스코이호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침몰선박 인양 전문가인 진교중 전 UDT대장은 발견된 침몰선은 돈스코이호가 100% 맞고 확실하다는 의견을 수차례 방송을 통해 확인해 주었습니다.


7. 금화·금괴 5,500상자 (현시세 150조원) 보물의 존재 역사적 사실과 기록들 

 

①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 제독 크로체스 오엔스키 중장의 쓰시마해전 전쟁 참전 기록에 돈스코이호에 금화와 금괴, 보물이 실려있다는 기록 

 

'쓰시마해전'으로 불리우는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본 연합 함대간의 대격돌 와중에서 발생한 당시의 상황을 해군 중장인 크로체스 도엔스키가 남긴 쓰시마해전 전쟁 참전 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도엔스키 해군 중장은 "침몰한 많은 함정 가운데 러·일전쟁의 군자금으로 쓸 금괴를 싣고 있어 '회계함'이라고 불리웠던 순양함 나히모프가 침몰 직전에 배에 싣고 있던 금괴를 6,200t급 수송선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 옮겨 실었으며, 대한해협을 빠져 나온 돈스코이호가 블라디브스토크로 가려고 동해로 나왔다가 추격해 온 일본군함에 의해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서 5월29일 오전 6시46분에 침몰했다"는 기록과 함께 "군자금에 사용할 엄청난 양의 금괴와 금화가 실려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1980년 9월 19일 일본 해양개발팀과 프랑스가 대마도 인근해역에서 나히모프호의 선체를 발굴됨으로써 도엔스키 중장의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돈스코이호에 대규모의 군자금으로 사용할 엄청난 양의 금괴와 금화가 가득 실려있다는 도엔스키 해군 중장의 이야기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 1932년 11월 28일자 미국 뉴욕타임스 보도 


1932년 11월 28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돈스코이호에는 영국 소버린 금화 5,000파운드 상자 5,500개를 싣고 있었으며, 무게 200톤으로 당시 가치로는 5,300만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침몰한 배의 금을 사냥하는 일본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바 있는데 당시 러시아는 1만4천명의 해군을 출병시켜 원거리 항해를 하였고 오늘날의 달러와 같이 연료(석탄), 식수, 보급품 구매와 장병 임금 등을 금화로 지급해야 하였기에 대규모의 군자금을 싣고 있었던 것입니다.


③ 러시아군으로부터 금화를 건네받은 울릉도 당시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한 울릉군지(鬱陵郡誌)


울릉도 생존자들의 증언이 기록되어있는 울릉군지에 보면 돈스코이호 침몰 당시 돈스코이호 레베데프 함장과 선임장교 블로킨 중령, 러시아 승조원들을 구한 독도의용수비대장 황순칠씨의 할아버지 홍재현 옹이 레베데프 함장으로부터 금화와 보석이 가득 담긴 동주전자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레베데프 함장으로부터 받은 증거물인 동주전자가 현재 독립기념관과 울릉도 독도박물관 향토사료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의용수비대장 황순칠씨가 자신의 할아버지 홍재현 옹이 레베데프 함장으로부터 받은 동주전자에 가득 있던 러시아 금화와 보석을 팔아 독도의용대원들과 마을 사람들을 움직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돈스코이호가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했고 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울릉군청과 이원휘 독도박물관 학예사가 확인해 주었습니다.


④ 러시아 대외비로 분류된 역사사료 

러시아 역사 해석의 석학으로 알려진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비소코프 미카엘 박사는 러시아 대외비로 분류된 역사사료를 통해 1905년 5월 27일 나히모프호가 확실히 돈스코이호에 접촉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⑤ 일본정부와 NHK의 100억원 (현가치 1,000억원) 투자 제안


1998년 5월 일본정부와 NHK는 한국정부와 KBS에 돈스코이호 탐사 겸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1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KBS는 즉시 이같은 일본의 제안 사실을 해양수산부에 알리고 해양수산부에서는 곧바로 관계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일본 NHK의 제안에 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당시 관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해역에도 돈스코이호와 비슷한 침몰한 선박이 수십 척이 있는데 왜 하필 돈스코이호에 관심을 두고 거액을 투자하겠다는지 의심스럽다" "국제 관례상 보물선 탐사는 투자 비율로 탐사물을 나누게 돼 있기 때문에 돈스코이호에서 150조원의 금화와 금괴가 발굴된다면 우리에게 불리하고 일본이 대부분의 금화와 금괴를 가지게 된다" "돈스코이호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서 끝까지 항쟁한 대표적인 역사적 해양유물로 러시아에게는 우리나라의 거북선과 같은 큰 의미가 있는데 일본의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며 거절하고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⑥ 은행 채권단과 파산법원의 추가 탐사 지원비 12억원 결재 


2003년 2월 동아건설은 한국해양연구원(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함께 금화와 금괴 존재 관련 증거자료와 함께 추가 탐사 지웝비로 12억원 결재를 은행 채권단과 파산법원에 요청합니다. 담당 재판부는 동아건설측과 한국해양연구원이 제출한 금화와 금괴 존재 관련 증거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증거자료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며 파산기업에게는 최초로 12억원의 거액을 추가 탐사 지원비로 결재합니다.


⑦ 2000년 12월 7일자 러시아 일간 시보드냐지(紙) 보도 


2000년 12월 7일 러시아 일간 시보드냐지는 러시아 공식 문서 기록을 인용하여 "돈스코이호에 당시 해군 예산의 일부인 황금을 선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하였습니다. 


⑧ 2000년 12월 8일자 미국 뉴욕타임스, 미국 블룸버그 통신, 영국 공영방송 BBC, 영국 인디펜던트,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타임스 보도 


2000년 12월 8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전설로만 알려졌던 금화와 금괴를 가득 실은 보물선 돈스코이호가 해양수산부 산하 정투 투자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에 의해 울릉도부근 해저에서 발견됐다. 돈스코이호에 실려있는 영국 소버린 금화와 러시아 금화, 금괴, 보물의 가치를 150조원으로 평가된다"고 보도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습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 영국 공영방송 BBC, 영국 인디펜던트,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타임스도 같은 소식을 보도하였습니다. 


천문학적인 보물을 실은 보물선의 전설 돈스코이호 스토리의 시작입니다. 


8. 돈스코이호 소유권 신일그룹 귀속 인정에 대한 국제사례 


① 1910년 벨기에 브뤼셀 국제협약 : "바다 밑에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발견한자가 공정하게 취득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② [콜롬비아 정부 발견 보물선 산호세호 소유권 귀속 승소판결 인양 사례 : 300년 전 침몰한 스페인 보물선 산호세호의 경우 보물선이 발견된 콜롬비아 정부의 소유로 2011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내고 2017년 11월부터 인양시작] 


현재 연안국의 영해에서 발견되는 100년 이상된 해저유물은 연안국의 관할권을 인정하고 인양주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 세계적 판결입니다.


보물선 산호세호 사례에서 스페인 정부는 산호세호가 군함이고 군함은 침몰 시기 및 장소와 무관하게 기국의 소유가 인정되므로 스페인 소유라고 주장했으며,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 영해에서 침몰한 산호세호를 콜롬비아가 발견한 것이며 자국법에 따라 콜롬비아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2011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안국의 영해에서 발견된 100년 이상된  해저유물은 연안국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콜롬비아 정부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돈스코이호도 100년 이상된 해저유물로 우리나라 영해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소유이며, 국유재산에매장된물건의발굴에관한규정에 따라 우리나라 소유입니다.


군함이라고 해서 원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던 과거 국제적 관례는 본 산호세호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에서 보듯 현재는 국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물선 돈스코이호 인양에 대해서 콜롬비아 정부의 보물선 산호세호 판결은 그 준거자료가 될 것이며, 러시아측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9. 러시아 정부와 한국 정부의 협의 


2014년 3월 26일 공개된 외교문서 '침몰 러시아 군함 인양문제 민원 검토'(1983년 생산)을 보면 이명박 정부시절 실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현 총리)은 2011년 11월 2일 러시아 제2의 도시로 현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돈스코이호의 인양 문제를 조율·협의한 바 있으며, 애국심을 고취하며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푸틴 대통령은 한국 바다에 잠들어 있는 돈스코이호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선 승리를 위해 돈스코이호 인양 성공을 바라고 있으며, 돈스코이호 인양자에게 10조원의 금전적 보상을 해주고 자국으로 배를 가져오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013년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시 전격적으로 러·일전쟁 중 돈스코이호와 같이 자침을 택한 인천 바랴그호 추모비를 방문한 것만 보아도 이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돈스코이호는 우리나라 거북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자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현재 적극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베리아 가스관 등 극동 에너지 개발과 남북 평화, 경제협력을 동시에 이뤄낼 수 있기에 양국 정부 서로의 이해가 맞아 공감대가 형성되어 이미 협의까지 끝난 상태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정태익 전 이명박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주 러시아 대사는 방송에서 수차례 확인해 주었습니다.

 

10. 소유권분쟁 해결 방안 

2014년 8월 러시아 정부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통해 돈스코이호 침몰 110주년을 맞아 ‘한·러 공동 돈스코이호 추모비 공동 건립’을 요청한 바 있는데 울릉도 내 돈스코이호 모형 추모비 건립과 수중에 잠자고 있는 돈스코이호의 부품 등을 인양, 전시 등도 추진하자는 제안이었으며 울릉군에서 당시 검토를 하였으나 결과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애국심 고취를 정치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요구에 맞아 2011년 한·러 정상회담에서 소유권 문제가 조율·협의되었으며, 돈스코이호가 인양되면 러시아에서는 애국심 열풍이 일어나고 푸틴 대통령의 3선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차원에서 핵심사업으로 추진중인 시베리아 가스관 개발을 포함한 극동 개발사업을 통해 남북한 평화와 경제협력까지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에 신일그룹은 민·관 협력을 통해 러시아 정부측에 울릉군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공동 추모비 건립, 인양 잔해 공동 전시, 러시아와 영화 공동 제작과 탐사 및 인양 활동을 영상기록으로 옮기는 탐사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소유권 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11. 돈스코이호는 배 자체만으로도 10조원 가치의 역사적 보물 

 

돈스코이호는 러·일전쟁 당시 전력의 열세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한 러시아의 애국심과 항일전쟁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인정하듯이 배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보물입니다. 전사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육상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발틱함대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출동하게 되는데 러시아 황제는 150조원의 금괴, 금화와 당시 제조한 스마르노프(smirnoff) 보드카를 가득 실어 전비와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도록 했는데 보물과 화물, 물품들을 돈스코이에 가득 실고 출발하여 출항전부터 큰 화제였습니다. 


1912년경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여객선 타이타닉호에서 건져 올린 와인 한 병 값이 소더비 경매가로 1억 5천만원에 경매되었으며, 얼마 전 경매에서 타이타닉호에서 발견된 승객 편지가 1억 9천만원, 바이올린이 16억 4천만원에 거래된 것을 보면 150조원의 금괴와 금화, 보물과 함께 실렸던 100년 넘은 보드카 등 화물과 물품들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겁니다. 

 

'돈스코이호' 탐사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1998년 2월, 우리나라 국민들이 국제금융위기(IMF)의 절망 속에 빠져 있을때였습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량실업 등 암울했던 시기에 극장에서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물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타이타닉'이 개봉됐습니다. 


바다 속으로 침몰한 전설의 여객선이 훌륭한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전설의 여객선 '타이타닉호'를 발견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타이타닉호는 현재 수차례 영화, 뮤지컬 등으로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는데 보물선 돈스코이호 인양은 영화, 다큐멘터리, 웹툰, 뮤지컬, 소설 등 타이타닉호를 능가하는 역사 문화 콘텐츠로서 세계적으로 보물선 신드롬을 일으키고 제2의 한류 문화를 재창출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높은 실업률에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일그룹은 우리나라 청년들과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신일그룹은 돈스코이호와 보물의 실체가 세상에 공개하고 문재인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기부, 추모비건립, 영화 제작, 탐사다큐멘터리 제작 및 상영, 웹툰 제작 및 서비스, 뮤지컬, 소설 등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다시한번 희망을 드리고 울릉도를 세계인들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신일그룹이 돈스코이호를 울릉도 앞바다에서 세상속으로 건져 올려 세계를 놀라게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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